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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것을 익히고/역사

6월 항쟁, 6.10 민주화 항쟁은 어떤 사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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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항쟁은 1987년 6월 10일부터 29일까지 전두환 정권에 대항하여 전국 각지에서 발발한 민주화운동을 지칭하는 말이다. 보통 6월 항쟁, 6.10 민주화 항쟁, 6월 민주화 운동 등으로 말하기도 한다.

 

개요

1987년 4월 전두환 대통령의 특별담화가 있었다. 5 공화국 현행 헌법대로 대통령 선거 즉 대통령 간접 선거를 진행하고 정권을 이양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특별담화는 전두환 대통령 자신의 임기가 1년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임기 내 개헌이 불가능하다는 명목으로 간접선거를 유지하겠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전두환
전두환

 

당시 대통령 직선제를 다시 시행하는 것이 민주주의로의 귀환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많은 사람들은 이에 대해 크게 반발하였고 재야 민주화 세력과 야당이 연합하여 국민운동본부를 창설하고 직선제 개헌을 이뤄내고자 하였다. 당시의 전두환 정권은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민주화 운동에 대해 강경 탄압으로 일관했다.

 

이를 통해 12.12 쿠데타로 시작된 군부독재 정권에 의한 권위주의 체제는 무너지게 되고 자유민주주의가 쟁취되었다.

 

4.19 혁명, 5.18 민주화운동과 더불어서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이끌어낸 대표적인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역사적 배경

1987년 1월 서울대 학생인 박종철 군이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의 조사 과정에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영화 1987에 묘사되었던 것과 같이 각종 고문으로 인해 젊은 생명을 앗아간 이 사실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분노했고 거리로 나서 시위를 하였다. 

 

이때에 경찰은 갖은 공작을 꾸미며 사실은 은폐하려고 하였고 그 과정에서 "탁!" 하고 치니까 "억" 하고 죽더라 라는 희대의 망언이 나오기도 했다.

사건 발표하는 장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하지만 시신 부검 결과 각종 고문의 흔적이 더욱 명확하게 증명이 되었고 부검의가 고문에 의한 사망이라는 것을 확인하면서 일파만파 커지게 되었다. 국민들의 분노가 더욱더 커지자 결국 고문 경찰들에 대한 처벌을 하면서 이 사건은 마무리가 되는 듯해 보였다.

 

이후 5월 18일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단에 의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은폐와 축소 조작된 것으로 밝혀지고 6월 9일 연세대 학생이었던 이한열이 시위 과정에서 최루탄 파편이 머리에 박히면서 사경을 헤매다 사망하게 되었다.

이한열

이로 인하여 기존에 산발적으로 전개되던 민주화 투쟁은 야당과 재야 민주세력이 총결집된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 결성으로 이어지며 비폭력 투쟁 민주헌법 쟁취 선언, 전국민적 민주화 투쟁의 구심점이 되었다.

국민운동본부 출범사진
국민운동본부

이처럼 국민저항운동이 대규모로 확산되자 전두환 정권은 수습을 위한 조치를 강구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6월 29일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의 이른바 '6.29 선언'이라는 직선제 개헌 시국수습 특별선언이 발표되었다.

 

항쟁의 의의

지속되는 강경 진압에 대해 군 내부에서조차 반대 여론이 압도적으로 많아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를 지켜보던 미국도 당시 행정부에 경고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전 국민들의 저항과 내외부의 압박이 더욱 강해지면서 전두환 정권은 타협을 선택했다.

 

결과적으로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의 직선에 수용 선언을 통해 야권의 요구를 받아들였음을 인정하였고 이 항쟁의 결과물로 대한민국 역사사 9번째 개헌이 이뤄졌다. 6월 항쟁은 전두환의 권위주의 통치를 민주화 항쟁으로 사실상 굴복시켰다는 점과 전 국민이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보여줬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그리고 실질적 민주화를 달성한 지점으로 역사 속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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