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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것을 익히고/역사

포르투갈 리스본 (리스보아) 대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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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 대지진

1755년 11월 1일 규모 8.75의 대규모 지진이 포르투갈 왕국의 수도 리스본을 강타했다. 이 강력한 지진은 리스본 내의 모든 건물을 무너뜨렸고 가톨릭의 만성절 미사로 엄청나게 많았던 성당 안의 신자들이 먼저 참변을 당했다.

 

단 시간 내에 세 번의 걸친 지진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건물이 없는 공간이 더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부두 방면으로 몰려갔다. 그러나 그들에게 닥친 것은 거대한 해일이었다. 바다에서 밀려온 이 거대한 해일은 도심지까지 휩쓸게 되었고 지진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조차 이 해일로 인해서 사망하게 되었다. 이 거대한 해일은 인근의 국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해일을 맞닥뜨리지 못한 곳에서는 불길이 밤낮으로 타올라서 도시 중심지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왕궁뿐만 아니라 장서와 대가들의 작품이 많이 보관되어 있던 도서관을 포함 리스본의 85%에 해당하는 부분이 붕괴되었다. 이 뿐만이 아니라 신대륙 탐험을 했던 모험가들의 지도 및 각종 유서 깊은 기록들도 모두 태워져 버렸다.

 

그 당시 포르투갈의 왕족은 리스본에 잠시 없던 상황이었고 미사에 늦게 참석하는 것이 관례라서 참석을 늦게 한 귀족들도 화를 피할수가 있었다. 당시 국왕이던 주제 1세는 리스본의 참담함에 놀랐다. 대부분의 시설이 붕괴가 되었고 인구의 절반 이상이 없어진 데다가 강도와 범죄자들이 들끓어 무질서한 상태에 있는 상황은 아름다운 리스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크게 상심 한 주제 1세는 자신이 믿고 있던 재상 카르발류에게 사태 수습에 대한 전권을 위임하였다. 카르발류는 우선 범죄자들을 처단하면서 도시 내 치안 확보를 우선으로 하였고 시신을 빠르게 수습하면서 전염병 창궐을 사전에 차단하였다.

 

 

이후 카르발류는 재난 대비 시스템을 구축하여 도시 계획법에 따라 리스본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이 때에 지진에 대한 과학적 연구와 국제 공조가 이뤄지면서 현재 지진학과 지진공학이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제 1세는 카르발류를 지속적으로 승격시키며 사실상의 독재를 허용하였다. 천문학적인 비용으로 재건한 리스본은 더 이상 지진에 취약한 도시가 아니게 되었으나 포르투갈의 경제적 황금기가 막 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이는 나폴레옹의 침공을 막지 못한 포르투갈 왕실이 남아 메일 카 식민지였던 브라질로 피난을 가게 되는 계기가 된다.

 

리스본 지진이 유럽에 미친 영향은 컸다. 지진이 발생했던 18세기 중반이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의 영광이 예전만 못하기는 했지만 신항로 개척의 선두인 해상강국으로 입지가 상당했던 국가가 지진으로 인해 한 순간 무너진 것을 보게 된 유럽은 큰 충격을 받았다. 또한 독실한 가톨릭 신앙의 도시로서 추앙받던 도시의 성당들은 공교롭게도 다 파괴가 되고 가장 타락했다고 비난받던 곳들은 지진의 피해를 벗어나 국가와 가톨릭 교회에 대한 권위를 의심받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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