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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것을 익히고/역사

청나라 제국 건설과 영토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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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는 중국 최후의 통일 왕조이다. 각종 역사 책이나 영화 등으로 접했던 정복자 성격의 청나라에 대해 역사적으로 어떤 변화를 거치며 제국이라고 불릴 수 있었는지에 대한 배경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민족 지배 및 영토 확장

1616년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합하여 후금국을 세우고, 1636년 태종 때 국호를 대청으로 개칭하면서 청나라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명나라가 망하는 틈을 타서 중국에 침입하였고 명나라의 유족, 삼번의 난, 대만의 정씨 등을 평정하고 전국 지배에 성공하였다. 130여 년 간 3대의 전성기에는 영토를 크게 확장하고 여러 제도의 정비, 대규모의 편찬 사업을 추진하여 학술을 장려하였다.

 

 

청나라 시기의 확장한 영토는 사실상 현재 중국의 영토의 대부분이라 할 수 있다. 1661년부터 1722년까지 재위한 강희제는 중앙아시아 초원지대의 반유목 민족이 건설한 중가르와 장시간의 전쟁을 치루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크고 작은 전쟁들이 지속되었고 강희제의 뒤를 이은 옹정제는 휴전협상과 무역을 통해 평화를 꾀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1750년에 반란이 일어나자 그 당시 제위하고 있던 건륭제는 중가르인에 대한 대학살을 자행했고 인구가 급감한 중가르 지역에 많은 백성들을 이주시켰다. 이후 건륭제는 튀르크, 위그르와 이스람교도 회족들이 살고 있는 지역을 침범하여 새로운 영토를 확장하는 업적을 남겼다.

 

명나라의 경우 티베트에 대해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전통적 분리 정책을 썼고 이는 청나라 초기에도 유지가 되었다. 그러다가 티베트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상황이 변화하게 된다. 청의 순치제는 1652년 북경을 방문한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가 작위를 받아들이자 청의 종주권을 티베트가 수용한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이 판단의 청나라만의 생각이었다. 정작 티베트는 그렇게 생각하지를 않다보니 청나라의 영향력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다가 티베트가 귀족들 간의 불화로 인해 혼란에 빠지자 대군을 이끌고 가 평정하였고 그 이후 황제의 권한을 대행하는 관료에 의해 통제를 받게 된다.

 

1684년 강희제는 대만을 정벌하고 격리 정책을 선포하게 된다. 구러나 토지가 척박했던 복건성 남부에서 인구가 급속도로 증가하자 앞서 중가르 정벌 이후 때와는 다르게 이주 정책은 필요없어지게 되었다. 급격한 속도로 대만으로 개척이민이 진행되었고 여기서 성장한 세력들은 훗날 청이 멸망할 때까지 청에 대항하는 세력들이 되었다.

 

 

청나라는 여기에 멈추지 않고 조선과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워 경계를 구분하였다. 러시아와는 캬흐타 조쟉을 맺어 현재의 국경선을 정하기도 하였으며 청은 꾸준히 영토를 넓히며 식민지화를 이끌면서 제국을 건설하였다. 제국의 범주 안에는 한족 외에도 티베트족, 튀르크족, 위구르족 등 다양한 민족들로 구성되게 되었다. 이 떄의 영토 확장은 중국 문명화 임무의 일환으로 해석이 된다. 새로운 영토와 그 곳에 있는 민족들에게 청나라를 이식시키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가장 번성을 누린 시기이면서도 가장 예민한 문제가 된 민족문제가 생긴 시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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