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히 어리석은 사람보다 반쯤 어리석은 사람이 더 어리석다.
완전히 가라앉는 배는 다른 배가 다니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반쯤 가라앉은 배는 다른 배가 다니는 데 방해가 되기 마련이다.
물론 사람은 '완전히 어리석은 사람'은 있을 수가 없고
자기 스스로 완전하게 바보라고 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지키려 하고, 귀중한 것으로 여긴다.
그러기에 자기 자신을 완전히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 한다.
그러기에 잘 모르는 일에도 나서서 어설픈 지식을 드러내 보이는 경우가 생긴다.
자기 자신도 자기가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런 마음은 강하기 마련이다.
'가득 채워진 항아리는 반쯤밖에 들어 있지 않은 항아리보다 운반하기 쉽다.'
라는 말이 있다.
자기 스스로 모르고 있는 것을 인정한다면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는 가르치기가 쉽다.
그러나 조금 안다고 나서는 사람들은 가르침을 거부한다.
자기가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모르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
궁극적으로 더 정확하고 많은 지식을 가지게 된다.
당나귀는 예루살렘에 가도 당나귀이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이자 성스러운 도시이다.
당나귀는 중동에서 오랫동안 짐을 나르기 위한 가축이면서
멍청한 동물로 알려져 왔다.
당나귀는 어디에 가던 당나귀이다.
외국 도시를 다녀온 당나귀도 집에만 있는 당나귀도 결국에는 당나귀이다.
당나귀에게 대학 졸업자가 입는 옷을 입히고 훈장을 달아주고
각종 장식들로 치장해도 결국 당나귀이다.
당나귀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사람에게도 해당되기 때문이다.
아는 것도 없으면서 위엄있게 보이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지식은 없으면서 최고급 자가용과 최고급 옷으로 자신을 꾸미고
본인도 이해하지 못한 책을 들고 다니며 남과는 다른 특별한 사람으로
보이길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 것은 당나귀가 몸에 장식을 걸친 것과 마찬가지로
단순히 눈에만 보일 뿐이다.
겉치레하는 것보다는 내실을 쌓는 것이 훨씬 의미 있고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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